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서브메뉴 바로가기
Home 역사관 농구단

농구단|  역사관

팬들과 함께한 정관장 레드부스터스 농구단의 지난 역사를 잊지 않겠습니다.

안양 KGC인삼공사는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인 시즌을 보냈다. 만년 하위팀에서 우승팀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KGC 인삼공사의 2011~2012시즌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시계바늘을 3년 전으로 되돌려야 한다. 2009년 4월 인삼공사는 주전 포인트가드 주희정을 서울 SK로 보내고 김태술을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2007년 신인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SK 유니폼을 입었던 김태술은 군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당장 성적을 원했던 SK와 미래를 내다본 투자가 필요했던 KGC인삼공사의 이해득실이 맞아떨어졌다. KGC인삼공사는 김태술을 동기생인 포워드 양희종과 함께 군대에 보내는 파격적인 결정을 했다. 이듬해엔 신인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박찬희를 뽑았고, 부산 KT와 외국인선수 트레이드를 하며 양도받은 지명권을 행사해 2순위 이정현까지 한꺼번에 손에 넣었다. 팀 리빌딩의 결정판은 2011년 신인드래프트였다. KGC인삼공사는 미리 오세근의 이름이 프린트된 유니폼까지 준비하는 등 온갖 정성을 기울인 끝에 거물 신인 오세근을 확보했다. 그 사이 김태술과 양희종이 군 문제를 해결하고 팀에 복귀하면서 KGC인삼공사는 강력한 베스트 5는 물론 가장 풍부한 백업 선수층을 갖춘 '우승 후보'로 발돋움했다.

외부에서 바라보기엔 순풍에 돛 단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착착 리빌딩이 진행됐지만 그 과정에서 겪은 이상범 감독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팀은 2008~2009시즌 7위, 2009~2010시즌 8위, 2010~2011시즌 9위로 뒷걸음질쳤다.
이 감독은 "이유야 어쨌건 감독은 성적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매일 사표를 양복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혹시 구단 에서 연락이라도 오면 '오늘이 그 날이구나'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3년여에 걸친 팀 리빌딩의 결과물에 대한 기대치는 높았지만 조직력으로 어우러지기까지는 시간이 부족했다. 포인트 가드 김태술이 군복무를 마치고 합류한데다 신인 오세근과 양희종, 박찬희 등 주축 선수들이 대표팀에 차출된 탓에 시즌 초반부터 끈끈한 조직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상범 감독은 “3라운드까지 5할 승률만 거둬도 다행”이라고 엄살을 부렸다. 그러나 KGC인삼공사는 분명 조직력에는 허점을 노출했지만 뛰어난 개인기와 체력, 젊은 패기를 앞세워 시즌 초반부터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로드니 화이트와 오세근 등 4명이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며 공격을 이끌었고, 살림꾼 양희종이 수비의 중심을 잡으며 1라운드를 6승3패 공동 2위로 마쳤다. 자신감을 얻은 KGC인삼공사는 2라운드에서도 가파른 상승세를 유지했지만 3라운드 초반 첫번째 위기에 직면했다. 외국인선수 화이트가 허리통증으로 2주간 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대체선수로 영입한 앨런 위긴스의 기량은 기대 이하였다.
그러나 화이트의 결장은 전화위복이 됐다. 사실상 외국인선수 없이도 선전을 거듭하며 국내 선수들의 조직력이 탄탄하게 다져졌다. 앞선에서부터 상대 공격을 옥죄는 수비 조직력이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수비에서 파생된 속공이 본격적인 파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KGC 경기 사진

선두 원주 동부와의 승차도 1.5경기 차까지 좁혀졌다. KGC인삼공사가 챔피언결정전 우승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크리스마스에는 SK를 상대로 80-63의 대승을 거두며 8연승을 달렸고, 그 과정에서 세 시즌 만에 시즌 20승 돌파와 전 구단 상대 승리의 기쁨도 맛봤다.
새해로 접어들면서 KGC인삼공사는 우승을 향한 승부수를 띄웠다. 확실한 득점루트였던 화이트를 크리스 다니엘스로 전격 교체한 것이다. 정규시즌보다는 플레이오프에 대비한 포석이었다. 포스트시즌 경기, 특히 김주성-윤호영-로드 벤슨으로 이어지는 동부의 트리플타워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높이의 열세를 극복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고, 정통 센터 다니엘스를 영입해 오세근의 체력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문제는 지금껏 애써 맞춰온 수비 전술을 처음부터 다시 짜맞추는 것이었다. 공격은 개인 능력으로 어떻게든 풀어갈 수 있었지만 약속된 수비를 위해 손발을 맞추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선두 동부와의 격차는 벌어졌지만 2위를 꾸준히 유지했고, 서서히 전술적인 조화도 이뤄지기 시작했다. 승리를 통해 자신감을 얻었고, 패배를 통해 교훈을 얻었다. 이 감독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상대 팀의 선배 감독들에게 배움을 청했다.

2월 17일 SK전에서 79-71로 승리하면서 4연승을 거둔KGC인삼공사는 SBS 시절이었던 2004~2005시즌 기록했던 팀 최다승(33승)도 34승으로 경신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는 KT에 73-51의 완승을 거두며 정규경기 준우승을 확정지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 승부’뿐이었다. 대진운도 KGC인삼공사의 편이었다. 높이의 팀 동부가 KCC-모비스전의 승자와 맞붙게 돼 껄끄러운 상대를 모두 피했다.
이상범 감독은 6강 플레이오프가 진행되는 동안 4강 플레이오프의 상대는 아랑곳 않고 오직 챔피언결정전만을 바라봤다. 동부를 꺾기 위한 한 자루 비수를 가슴에 품고 날마다 날을 벼렸다. KT와의 4강 플레이오프를 무난히 통과했지만 챔피언결정전 1차전부터 아쉬운 패배를 맛봤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부가 손쉽게 우승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KGC인삼공사는 2차전에서 유쾌한 반전 드라마를 연출했다.

동부의 전매특허인 드롭존 수비로 허를 찔러 승리를 가져왔고, 동부가 3차전에서 드롭존에 대한 해법을 들고 나오자 곧바로 맨투맨 수비로 전환해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1점차로 패했지만 KGC인삼공사 선수들은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고, 거꾸로 동부 선수들은 이상하게 경기가 꼬인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다.
이상범 감독은 동부의 유일한 약점인 '체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리바운드를 잡으면 바로 상대 코트로 뛰어들어 공격을 전개하고 성공하건 성공하지 못하건 무조건 슛을 쏘고 다시 백코트하며 쉴 새 없이 선수들이 코트를 누비게했다. 속공과 그에 이어지는 2차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지다보니 동부의 수비 위치도 순간순간 뒤바뀌었고, 동부의 자랑이었던 드롭존 수비에도 구멍이 날 수밖에 없었다. 만년 하위팀 KGC인삼공사는 그렇게 ‘동부산성’을 무너트리고 마침내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인고의 세월이 길었던 만큼 정상의 환희는 달콤했다. 그러나 KGC인삼공사는 시즌을 마치자마자 박찬희을 상무에 입대시켜 '제2의 팀 리빌딩'에 돌입했다. '뛰지 않으면 진다'는 각오로 숨 돌릴 틈 없이 내달려온 KGC인삼공사다운 선택이다.